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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일 일요일

연극 -송화가루-

극장에 딱! 들어섰는데 정사각 형태의 인조잔디가 예쁘게 깔려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뭐지? 연예물이었나?
송화가루는 소나무의 꽃가루라서 봄철에 노란 먼지같은게 있으면 대부분 송화가루인데
왜 나는 연예물쯤으로 생각했을까? 시놉을 미리 보려해도 워낙 습관이 되어있질 않으니 잘 안된다.

연극이 시작과 동시에 한 선수가 축구공을 열심히 찬다. 그제서야 잔디밭이 축구장이란것을 알게 되었다.
포스터만 보면 영락없는 연예물인데. 엄밀히 보면 연예물 같아서 솔직히 예매하기 좀 꺼렸었다.
(멜로를 좋아하지만 연극으로는 그다지. 슬퍼서 눈물이라도 고이면 챵피하기도 하고.)
물론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이 극의 정체성? 장르? 는 무엇일까?
새터민(탈북이주자들)에 대한 갈등을 다룬 심리, 르뽀, 다큐, 부조리 인가?
아니면 축구부 학생들의 성장물일까?

내가 보기에 송화(새터민)의 배경은 임의로 사건을 만들기 위한 도구일뿐 성장드라마 쯤으로 보는게 맞아보인다.
전체 흐름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축구부원들간의 갈등은 송화와 부원들 외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새터님으로서 탈북당시에 트라우마로 인한 주변인들과의 갈등, 고뇌 같은것을 극적 요소로 활용할뿐
이들의 삶에 대한것을 다루는 사회현상과는 거리가 한창 멀다.
송화 대신 외국인 특히 한국사람들이 무시하는 좀 못 사는 나라 사람 누가 들어와도 비슷한 상황일것이다.

이기기 위해 축구를? 여럿이 팀으로 해야 하는데? 차라리 격투기를 하면 상황이 맞기나 하지.
결로은 그냥 축구를 할때 기분이 좋다는 것. 이건 축구부 부원 모두와 스탭들도 모두 공감하는 것으로
송화의 배경이 갖는 상징성의 의미는 없어진다. 애니매이션에서 하니가 미친듯 뛰어다닌것과 같이
몸을 엄청 쓰는것이 복잡한 생각을 잡아주는대는 특효라서 속 시끄러운땐 운동만한게 없다.

그래서 전체적으론 성장드라마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냥 낯 뜨겁다. 연극은 충분히 상황을 잘 살리지만
성장드라마는 아무래도 상황들에서 손이 좀 오그라 드는 경향이 있다보니 20대 초반까지는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30대 이후부턴 안보게 된다. 더이상 철학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고(어떤 깨달음이 있더라도 금세 잊어먹음 -.-;)
중2병 같은 판타지를 품는듯한 성향도 있고. (중학생때 일기를 읽어보면 이해 될듯)

그리고 축구라는, 어떤면에서 보면 작은 극장에서는 표현하기 썩 좋지 않은 소재란 생각도 든다.
슛한번 제대로 할 수 없어서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그 효과를 대신하지만 경기의 긴장감, 긴박감, 순간 순간 동물적 감각 등의
표현 자체가 거의 전무하기때문에 배우들은 이 상황을 좌절(0:9로 깨질때)할때나 졌지만 기분 좋을때나
감정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저들은(배우) 한창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막상 이곳은 작은 소극장일뿐이니
아마도 대극장에서 공연을 한다고 이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달라질거 같아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뻔한 엔딩. 엄밀하게 보면 뻔하다기 보단 난 이길줄 알았다. 그래서 결승은 아니라도 축구부는 존속할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런면에선 뭐랄까? 제법 괜찮은 엔딩이라고 할까?
아마도 여기서 축구부가 존속하는 쪽으로 흘렀다면 연극의 느낌은 좋지 않았을것이다.
(순리를 저버리는 엔딩은 짜증이 동반될뿐임)

송화의 고통이 좀더 극적으로 좀더 심층적으로 묘사되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더라면,
성장드라마가 아닌 서사극이나 부조리극 형태였다면 어땠을까?
한국사회에서 새터민에 대한 사회 갈등요소는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것을 송화하는 한 인물을 통해,
너무 어린 나이에 넘어왔기때문에 어느쪽도 치우치지 않은 한 생명을 놓고 저울질 해대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칼날을 댔다면
연극을 보면서 웃을수는 없었겠지만 우리 한국 사회를 다시금 돌아볼수 있지 않았을지.
이런 면에서 소재(새터민과 아이)가 조금은 아까운 생각이 든다.

송화가루처럼 널리 흩어졌으면 하는 송화의 바람.
현실은 사방에서 생각없이 날라오는 비수들. 그로 인한 한 인간의 파멸의 서사.

아무튼 성장드라마로 살짝 살짝 웃으며 2시간이란 시간이 짧게 느껴졌던 제법 괜찮은 극이었다.

출연 : 이유진, 김예진, 박지영, 하예은, 윤수인, 이수진, 공아름, 김민형, 이미라, 윤동성, 김재용

-추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극단 공연의 티켓가격은 최저임금 두배를 넘지 말자




2026년 7월 5일 일요일

연극 -호기우타(寿歌)-

 

호기우타란 뜻이 축복의 노래라고 하는데 연극에서 나오는 노래 제목같기도 하지만
노래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일본 노래이고 일본 제목이고 일본이름에 일본배경인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성지게 쓰고 있는건 왜 일까?

이 극단의 위치가 전라도에 있는건가? 아니면 그곳에서 초연을 했었나?
아니면 원작에 나오는 게사쿠, 쿄코는 지방 사람으로 그 지역 사투리를 강하게 쓰는 캐릭터들인가?
야스오는 상대적으로 서울경기권 말을 쓴다.
처음엔 일본것을 한국식으로 각색한줄 알았지만 대사 무엇도 한국적인건 없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하늘엔 미사일이 날라다닌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미사일을 소진하는것이라 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세계대전에 일본이 패망할때 얘네에게 미사일이 있었나? 없었을텐데.
리듐미사일이란건 또 무엇일까? 기계가 알아서 남아있는것들을 오류로 막 쏘아대고 있다는 설정이다.
뭐 그럴수 있겠지. 상황에 따라선. 연극인데.

하지만 이해하기에 전반적으로 당시 일본에 퍼져있던 공포나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기류를 한국사람인 내가 알긴 어렵다.
일본은 패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질라'같은 영화나 지리적 영향(지진,화산,스나미)으로 수많은 전설들이 생겨났다곤 하지만
이 역시 타국 사람으로서 직감하기엔 쉽지 않은 면이 있다.

다만 보는 내내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오르는건 왜 그랬을까? 일본에선 '고도를 기다리며'와 쌍벽을 이루는 부조리극이라 칭한다는데
내가 보기엔 자국민들에겐 그렇게 다가올지 몰라도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보편적 상식 내에 있는 작품인 반면
'호기우타'는 한참 떨어진 특정 지역 혹은 특정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을 위한 작품으로 보인다.
조금 건너 있는 한국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감성이라면? 그들만의 작품이 아니던가.
두 작품을 비교할 마음은 없기때문(보면서 생각이 났을뿐임)에 비교는 여기까지만 하고
호기우타를 보기 위해선 사전 지식이 필요할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일본의 노인층들은
가슴 깊은곳에서부터 울리는 떨림(두려움같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라 할지라도 쉽지 않는 전개다.

게다가 왜 그렇게 전라도 사투리를 써대는지. 이것때문에 감정선이 더 망가지는거 같다.
지역감정을 만들어 선거에 이기려 했다거나 광주민주항쟁같은 참사가 있었기때문에 어느정도 공감대나 감정선을 이을수 있겠지만
서울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도무지 심정적 연결점을 찾기가 쉽진 않았다.

어렵다고 해야 할지. 어떤 지식과 통감하는 무엇이 필요한것인지
일본인들에겐 원폭 두방 맞고 패망 이 후 두려움이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던걸까?
시대적 배경을 보면 한국전쟁을 기회삼아 큰돈을 벌어대고 그걸 바탕으로 경재대국이 되가고 있을때 아니었나?
이때 기타무라 소라는 작가는 왜 이런 막연한 공포과 기대감이나 이상한 희망같은것을 동시에 선사하는 작품을 만들었을까?

국가가 갑자기 부흥할때의 불안감인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기대와 불안함이 공존하는것과 같이?

출연 : 이경민, 정다연, 우범진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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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30일 토요일

연극 -화성에서의 나날-

 

참 오랜만에 어려운 연극을 접하게 되는거 같다.
대사가 너무 많고 불필요한 상황설명이 너무 많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구인지 왜 두명인데 일지는 모두 '환'인지
분명히 환과 욱이 얘기 하고 있는거 같은데 비관적인 욱과 희망적인 환
하지만 막판엔 한명만 남은것인가? 아니면 죽은 사후인가?

스토리 전개가 어렵고 대사량이 많은 반면 귀담아 들을 내용이 잘 없다보니 흘리게 되는데
이러다가 중요한 내용들을 모두 함께 흘려보낸 느낌이다.

가끔 아주 가끔 집중하게 되지만 90% 이상은 흘린다.
모노드라마가 아닌데 그렇게 많은 부연설명들을 해대야 했을까? 눈감고 들어도 되는 라디오 드라마도 아니고
요즘 유행인지 이렇게 상황 설명을 과할정도로 많이 붙이는 연극들이 있는데
작가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
원래 다인극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가 인원을 축소하면서 관객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지문까지 모두 읽게 하는건지
몰라도 될 배경까지 다 들어오니 심각할정도로 피로해지는데 이런식으로 두시간을 진행한다.
절반은 지문.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그리고 제발 가운데 무대를 놓고 좌우로 객석을 찢어놓지좀 말자
가끔 우연히 앞사람과 눈이 맞아버리면 매우 어색해지는데 뻘쭘한 기분때문에 한동안 대사가 귀에 안들어온다.
그래야 될 상황도 전혀 없는데 뭘 좀 있어보이겠다고 이 지랄로 무대를 셋팅 하는지
대극장의 무대가 크니 무대 위에 관객석을 만들어놓은것이다.
엄연히 좋은 관객석이 있음에도 엉덩이 아픈 간이의자. 두시간 공연
이 무슨 빙신같은 연출이란 말인가?
이런 구성이면 소극장에서 하면 딱인 구성이다. 이런 대극장이 아니라 딱 소극장용 연극
소극장 대관이 안되서 대극장을 어쩔수 없이 쓴건지 알수 없지만 낭비도 이런 낭비가 있을까?

아무튼 전체적으로 난해하지 않은데 난해해진 이상한 연극을 불편한 의자에서 시야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무대를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보고 나온거 같다.
집중하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대사 한마다 기억나질 않는다.
그래서 뭐라 쓸 말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다.

제발 무대는 일반적인 형태를 쓰자 아니면 아예 가운데가 찢어진 극장을 섭외하던가.
그리고 불필요한 말들은 좀 빼자. 집중 안되고 산만하다.
단 두명 나오는데 어쩜 이리도 정신이 없는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노고 그리고 큰 대형 극장이 너무 아깝기만 한 연극이었다.

출연 : 강희제, 백종승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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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5일 일요일

 

돔박아시? 이게 무슨 말이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연극을 보니
가수 이미자씨의 노래 동백아가씨를 말하나? 했는데 동백나무란 의미라 한다.
동백꽃이 왜 4.3사건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고이래는 4.3사건때 돌아가신 어느 가족 중 생존한 딸 이름이며 연극의 주인공이다.

제목이 이래서 제목 자체가 무슨 뜻이 있는 말인가? 싶었는데 그것까지는 아니었다.
(돔박아시가 동백꽃을 의미하고 그것이 4.3사건을 상징하는 꽃인줄 알았다면 좀더 마음의 준비를 했을텐데)

연극은 전체적으로 4.3사건때의 비극을 겪었던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전개된다.
제주도주민을 학살한 장교가 지금 세상에선 위대한 인물로 바뀌어 동상을 세우려는것과
그에 대해 진실을 토로하는 사람들과의 대립을 보여준다.
시작부터 묵직한 저음이 몸을 감싸고 어둡고 침침한 조명의 경찰서에서 시작한다.
교도소에서 끝맽음 되기때문에 전체적으로 편히 보기엔 무척 어려운 내용이다.
그리고 제법 슬프고 때론 짜증나기도 하며 분노도 생기는 참혹한 현실을 반영한거 같다.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것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웠겠지)

제주도 해군기지를 강정마을에 짓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양분되서 서로 싸우게 만들어버린 사건이
불과 십수년전 이야기인데 이때 찬성파를 선동해서 한 마을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만든
개같은 놈들의 농간에 쑥대밭이 되어가던것을 지금 우리 세대들이 직시하였지만
언제그랬냐는듯 모두 잊혀지고 그곳에선 군함들이 정박하고 있는지 십수년이 되어가고 있다.
4.3사건에도 이승만 매국노가 저지른 참사로 이때 수만명을 살해당했다.
그리고 도민들의 사상을 검증하고 연좌제등으로 괴롭히고 감시하며 그들의 입을 철저히 막아왔다.
그렇기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4.3사건은 널리 알려지지도 않고
진실을 아는 사람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주된 범죄자인 친일매국노 박진경 대령에 대한 내용인지 구체적으론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연극은 비단 4.3사건만을 비추진 않는다. 어떤의미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
매국노들의 삶과 이 후 세대들의 면면을 보여주므로 현실에 섞여있는 매국노들의 후손들의 진실이 드러나는데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서 국민을 핏박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는데 이건은 인간의 본능일까?

815해방이 된지 100년도 안되었는데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는 조선시대보다 오래된 역사로 받아드려진다.
수많은 초중고 교육에서도 이 시기의 역사보다 조선시대를 훨씬 깊이 공부한다.
그래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나라를 세울때의 공신들이 화폐에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있다.

일제강점기, 4.3사건. 한국전쟁, 광주민주항쟁 등 수많은 사건들의 바탕엔
한국 깊이 뿌리박혀 있는 매국노들로부터 비롯된것으로밖엔 생각되지 않으며
친일매국노 동상을 무너뜨렸다고 후손들이 형사처벌을 바는 이 연극의 내용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 이재명 정부 이렇게 20여년의 민주정부가 들어왔어도
아직도 4.3사건을 공산당 처벌따위로 떠드는 사람들이 4월3일 제주도 4.3 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집회를 하고 있는 실정이니 무엇이 이들의 넋을 위로해줄수나 있을런지.
설사 공산당을 지지했다손 치더라도 사상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고 헌법에 떡하니 명시(제19조) 되어 있는데
아직도 집회에 나와서 빨갱이 운운하고 내란세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활보한다.
민주정부 20여년이 다 되어가도 매국노들의 뿌리는 깊고 넓어서 캐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국립묘지에서 이승만과 다카키마사오(박정희)와 매국노 군인들은 캐내야 하는게 아닌가?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노역을 한 한국 국민이 아직도 버젓이 살아계신대도 일들을 놓고 온갖 모함을 하는
매국노들이 아직도 있고 4.3사건도 그렇고 민주항쟁도 그렇고 과거사 청산은 쉽지 않게 돌아가니
이때 당했던 수많은 생존자들의 한을 어떻게 풀어줄려는지.

다시 연극으로 돌아와서 한 가정의 역사를 통하여 비통한 한국의 현대사를 보여준다.
파탄났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남아있는, 사랑을 하는 그래서 슬픈 어느 한 가족의 이야기.
세대가 지나도 힘을 갖고 있는 매국노 집안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깡패들은 여지없이 저들을 밟으려 한다.

연극이 끝나고 집에 오는데. 아직도 지구에선 수많은 나라들이 내전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같이 고치기 힘든 현대사로 남을까? 아니면 프랑스 혁명이나 1,2차세계대전때 전범들 처리하듯
관련자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한국과 같이 매국노들이 계속해서 세력을 유지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쿠데타가 몇번은 거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대항하다가 살해당하며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가겠지. 하지만 이때까지 고통 받던 이들은 누가 위로해줄 수 있는걸까?

고이래씨는 감옥에서 위로받았을까?

출연 : 황세원, 윤일식, 송철호, 황재희, 서미영, 민경준, 조성현, 한은주, 백지선, 이의현, 이현종, 신수호, 조인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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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4일 토요일

연극 -해녀 연심-

4.3사건을 모티브로 한 연극이라곤 하지만 내가 4.3사건에 대한 참혹함을 제대로 공부하거나
자료를 접해본적은 없다. 이승만이 제주도민 수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라는것정도이다.
이정도면 제주도민의 30%이상을 학살한것이라서 연극처럼 타국(일본)으로
밀항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런 이승만을 아직도 국부라고 떠받는놈들이나 국립묘지에 있다는것이
한국의 안타까운 현대사이자 현실이 아닐수 없다.

연극은 이때 밀항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수자(둘째딸)는 이미 늙을대로 늙은 할머니가 되어 손녀 '여름'이까지 있는데
오사카의 왕할머니(수자의 엄마)가 돌아가시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사카로 가게 된 여정을 그리는데 거의 중 후반까지는 왜 엄마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을까?
또는 둘째딸 수자를 부르지 않았을까?였다. 본인의 여건상 한국에 갈 수 없었다면 불러올수라도 있었을텐데
(엄마가 오사카에서 다른곳을 가지 못하는 사유는 막바지무렵에 이유가 나옴)

퉁명스러운 수자 할머니. 어떻게 살아왔는지까지는 모르겠다. 분명히 어렷을땐 오사카를 갔었다고 나오는데
막상 돌아온것은 혼자였고 동내에 가족이 있었던것도 아닌거 같는데 해녀로 살아왔다는건지
내용 흐름이 좀 거칠지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는지 수자의 성장기는 별 내용이 없다.
(마지막 엄마 고연심의 독백 나레이션보다 수자의 성장기를 좀 넣지)

제주 4.3 사건을 시작해서 이념으로 인한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
이 굵직한 사건들속에서 작은 한가정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전쟁이나 4.3때문은 아닌거 같다
첫째딸 화자는 가수가 되겠다고 도쿄를 갔다가 북한 사람들 꼬임에 넘어가 북으로 넘어갔고
기자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그냥 살고 있고 수자는 어떻게 넘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넘어와서 물질(해녀) 하며 살아갔다. 엄마는 일본에서 역시 해녀로 살아왔다.

내용상 한국역사에서 가장 그지같이 원통한것은 혈육을 이념으로 갈라놓은 양쪽 정부때문에 본의아니게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이것은 지금도 지속되고 대부분 실향민들은 고향을 그리워 하다가 돌아가시고 이제는 생존한 사람이 거의 없는 지경이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천륜을 박살내도 되는것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로 인해 엄마 고연심은 일본에서 어디도 갈수 없는 처지가 되버렸다.
첫째를 보러갈수도, 둘째를 보러 갈수도 없었다.

이부분에서 엿같은 현실에 너무 슬펐지만 주변에서 다들 슬퍼하는 통에 상대적으로 나는 덜 슬플수 있었던거같다.
아무튼 중반부 부터는 제법 슬프기도 하고 좀 신파같이 너무 감정을 쥐어짜는 경향도 없진 않았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묘하게 와닿는 이 감정선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는거 같다.

저들이 저렇게 떨어져 있으면서 원망과 그리움으로 평생을 살아온 마지막 절규.

연극이 전체적으로 잿빛이긴 한데 너무 처지지 않기위해 분위기 쇄신을 차원에서 적지 않게 섞인 코미디가
흐름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도록 감초역활을 충실히 해준다.
그러면서도 감정선이나 템포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신파적 성향이 제법 쌔다.
건조한듯 넘기면서 감정이 속에서부터 터져나오면 걷잡을수 없는데
이미 배우들의 오열로 시작하기때문에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그런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는것에서
내 감정은 이 연극속에선 없어진거 같았다. 신파의 특징이기도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슬픈 상황을 만들어(최루성 드라마)서
슬프고 슬펐지만 무엇이 남았는지는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모자식간의 천륜을 외적힘이 인위적으로 끊으면 한이 된다는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속 시원하게 후련히 울게 하던가.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찝어주던가.
제대로 코미디를 섞던가. 연극 전체 구성은 좋지만 묘하게 조금씩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4.3사건의 참혹한 현실도 표현이 안되고 한국전쟁이나 이념전쟁에 대한 것도 없이
부모의 자식 사랑 정도만이 남는거 같아서 배경 특성상 약간은 아쉬움이 조금 남는 연극이었다.

출연 : 권지숙, 김기강, 박완규, 김소진, 서옥금, 이혜미, 김해서, 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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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8일 일요일

연극 -내가 살던 그 집엔-

 

무대가 상징하는것이 무엇일까. 단순한 구획인지
제목과 같은 집이 표현되는듯 보이진 않아보인다.
무대 장치라고 해봐야 망사같은 곳에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무대를 표현하는 정도?

여권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1970년대 여성들의 삶을 표현한거라고 하는데
전쟁과 군부쿠데타로 남성성이 커지는 사건들이 발생하면 상대적으로 여권은 바닥으로 떨어졌었다.
심지어 외화벌이 수단으로 매춘을 이야기 할 정도의 시기였으니
(일제강점기 친일 매국노 아니랄까봐 이런놈이 정권을 잡으니 별 사건이 다 있었던 암울한 시기)

이때의 세 여성상을 보여주는거 같긴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아닌거 같다.
화교, 이주노동자, 한국사람 이정도인데 화교는 엄밀히 말해서 한국에서 그렇게 천대받던 존재는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가진 재력을 정권에서 어떻게든 빼앗으려고 애써왔을뿐
외주노동자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상대적으로 못 사는 곳에서 온 노동자들에 대한 삶의 애환이 있다.
그러나 이건 1970년대는 아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인 노동자들이 넘쳐나던 시절.(농어촌에서 도시로 몰려오던 시기)
극에서 표현하는 이주노동자 꾸엔은 대략 1980년대? 딸의 성장시간을 감안하면 1990년대정도?
아무튼 시간대가 조금 맞아보이진 않지만 대충 그러하다.

엄마가 봤던 마마와 마마가 봤던 엄마의 기억이 좀 차이가 난다는 것인데
이것은 딸의 시점에서 전개되기때문에 딸의 시점에서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이렇듯 서로의 관점에서 보는 세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긴 한데 그것이 이 연극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난 아직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

공통점은 이 세명의 여자는 자신의 현재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왔다는 것
그래서 떠나고 싶고, 쉬고 싶고, 돌아가려 했던것일거다.

이런건 굳이 과거를 보지 않고 현재를 봐도 크게 다름 없다. 지금도 안식처로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욕먹는 일부 부유층 마져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마다 고민과 고뇌, 번민 등으로 매일 매일 머리를 쥐어짜며 살고 있던 인류 역사는 너무도 깊고 아득할정도다.

그 중 종이처럼 얇은 어떤 시간을 이 연극은 들여다 보는 것이다.
여기서 여권이 낮아서 핍박받는다고 보일수 있지만 근본적으론 자신의 처지와 돈의 힘에 억눌려 아내를 죽인 남편이나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두려움속에서 용기를 낸 아내(마마). 그를 지켜본 또다른 여자(엄마)
그 남자의 공포를 지켜봐왔던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있는 다른 세상의 엄마 꾸엔

내가 살던 그 집이 아닌 그 집에서 벌어진 일들 속에서 한 여성(딸)은 세 여성의 기억을 나열하지만
글쎄 무엇을 찾았을까?
엄마가 감옥생활을 하는 통에 고아 아닌 고아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딸은 어떤 세상을 보며 살아왔을까?

좀처럼 납득이 안되는 전개가 바로 딸의 삶이 녹아들지 않는다는것이다.
과거 엄마와 친구와 친구집에 눌러사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와 그 시대는 알겠는데
이 딸은 그냥 해설잔가. 이 딸이 지금의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필요없는것인가?
지금 여권이 엄청나져서 이 딸의 인생은 그냥 순탄했던걸까. 흐르는 내용으론 결코 그러지 않았을텐데.

이들의 희생때문에 지금 세대들이 힘차게 전진하며 살아갈수 있는것도 아니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이 연극은 내용보다는 연기로 봐도 얼추 절반 이상은 먹어준다.
구성도 전위적인면이 좀 있어서 생각하느라 지루할 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생각할 틈도 거의 없었다고 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조촐한 무대에 반하여 배우들의 순수한 연기력이 비주얼적으로 대단히 강렬한 연극을 만들어 낸다.
이정도면 연극의 좋고 나쁨을 떠나 충분히 볼 매력이 생겨날수밖에 없다.
다만 시대와 내용상 마음 한구석이 아릴수 있다.
그래서 젊은 세대보단 조금은 나이가 있는 세대가 보면 훨씬 더 아플수 있다. 그 시대 억눌렸던 여성들에겐.

지금은 기성세대가 된 여성들이 보며 지금 내 딸들의 세상이 어떤지.
내가(그 시대의 여성들이) 무엇을 바꿨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칭찬과 위로를 전하길 바라는 연극이었다.

출연 : 곽지숙, 정다함, 심연화, 전형숙, 김영준, 이상홍, 안병식, 이승혁

-추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극단 공연의 티켓가격은 최저임금 두배를 넘지 말자

2026년 3월 1일 일요일

연극 -튤립-

 

3.1절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한 가정사를 그린 연극이라니
우연은 아닐거같고 아르코극장에서 어느정도 시기를 맞춘것을 내가 구매한것이겠지
요즘은 점차 연극을 보기 앞서서 시놉시스를 좀 보려고 애쓰는 편인데 하필 이번엔 보질 못했다.
제목이 '튤립'이니 솔직히 멜로인가? 싶었다. 포스터도 진한핑크? 보라? 배경이라서 더욱더 그렇게 생각한거 같다.
물론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지만 아쉬움따위는 생각나지 않을만큼 연극이 무척 훌륭했다.

일단 무대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사방을 막아버렸다. 대형극장이니 주변에 배우들의 통로가 있을텐데
이 모든것을 막은 대형 검은색 곽의 형태로 심지어 배우들이 입장할때도 관객석 통로에서 들어온다.
이건 무척 특이한 설정이다. 배우들은 어디도 갈곳이 없어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나면
벽쪽으로 붙어서 앉아있거나 서있는다.

환경이 이러한데 연극의 흐름은 묘한 반전이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국가 잃은 아픔의 변질된 형태인지.
아들인 쥬리프의 행동이라거나 쿠로(조선까마뒤)와의 관계라거나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무엇인가 조금씩 트러져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행인 조차 없는, 어두 침침한 암흑속

좀 특이한것은 왜 튤립이냐는 것인데 꽃말은 전반적으로 '사랑 고백' 같은 류이다.
오래전에 일본군이 한국의 갓난 아기들을 참혹하게 죽인 일들이 있다. 하지만 이 군인은
특이하게도 갓난 아기를 대려왔다. 너무나 사랑하는 친자식처럼 대려왔다.
엄밀히 보면 훔쳐왔다? 빼았다? 아기의 엄마가 있었으니까. 이부분에서 작가는 어떤 감정으로 이러한 서사를 그려같거지?
보통은 아기엄마가 죽었을때 아기를 못 본척 하려다가 마지못해 대려같다거나하는 전개인데
엄마가 죽은것이 아닌 아기를 빼앗고 엄마를 죽인다. 왜? 이 일본군은 결혼을 했지만 아이가 없었다.
그 이유때문에? 주변에 튤립이 엄청 많았다던데 이건 또 왜? 연해주의 연추에 튤립이 많은 곳인가?
뭔가 내가 모로는 역사가 있는것인지 궁금하지만 마땅한 정보가 없다는게 아쉽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계속되는 관계가 좀 모호하다.
일본군 부부는 이 훔쳐온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고 말한다. 엄마도 아빠도
부부의 관계는 무척 안좋지만 아이를 중심으로해서 버텨가고 있는것 같은 늬앙스를 풍긴다.
이 군인은 아이가 없으면 부인과 헤어질거 같은 두려움에 아이를 훔쳐던것이 아닐까 싶은정도의 특이한 가정.

여기에 쥬리프의 친아버지가 한국을 건너 일본으로 온다. 물론 아기를 찾기 위해서이다.
군인은 친아버지가 찾아왔을때 죽이거나 쫓아내지 않고 동경대 다니는 자식학교에서 일을 하게 해준다.(해준건지 찾은건지)
일말의 양심같은것이었을까? 침략자의 여유, 관대, 나태였을까.

독특한 흐름의 느낌을 꼭 찝어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저들의 대사 한줄 한줄에 온갖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금세 잊혀진다. 몰일하다가 힘이 풀린다고 할까?

결국은 일제강점기때의 이 가정에서 한국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일본인들 비위를 맞추며 살던 미호만이 살아남는다. 쥬리프도 극상으론 살아남은거 같지만 히로시마로 일을 하러 가고
당시가 1920년대였다면 25년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명확하진 않아보이지만
적어도 당시에 한국인들의 일상과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인들의 합리화로 애쓰는 모습들만큼은 확실하게 그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주제라고 보여지진 않는다.

튤립의 구근(마늘같은?)이란걸 많이 강조하는데 이것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은 뿌리까지 말살하지 않으면 항상 다시 되 살아난다는 의미였을까
겉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는 아니라는 것이었을까.

3.1절이 일본을 긴장하게 만들고 세계적으로 알린 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때 우리 한국인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또 이후로 많은 변절자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세계 상위권 강국이 되어 있는걸 보면 튤립의 구근같은 민족이 아닐까.

멋지고 훌륭한 연극이지만 기분좋게 일어나긴 어려운 연극이었다.

출연 : 김정호, 김하람, 권정훈, 윤경, 황순미

-추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극단 공연의 티켓가격은 최저임금 두배를 넘지 말자



2026년 2월 15일 일요일

연극 -멸종위기종-

 

멸종 위기라는게 요즘은 다른 생명체보다 인류의 멸종을 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인류의 멸종을 의미하는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실제 멸종위기에 빠진 조류를 촬영하는 사진작가, 기획한 매거진, 동물원 등 몇가지의 인물배경이 나온다.
여기서 가장 현실적이며 독특한 설정이 매거진 기획자이다.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가스라이팅하는 전형적인 영업맨(최유형)의 면모를 보인다.
문제는 이 사람의 논리가 사회에 통용되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예술가라 하더라도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지 않으면 예술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을 잡아야만 본인이 하고자 했던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게 된다는 점 등
사람들이 혹 할만한 현실의 꼭지점 같은 요점의 비수로 심장을 찌르듯 들어온다.
이러니 두 사진작가가 안넘어갈 수 있겠는가.

원로 사진작가(반우)는 이미 수많은 이런 현실을 겪어왔고 그에게서 배우려고 들어온 젊은 작가(정은호)는
그 현실을 아직은 알지 못하여 유형(매거진)의 말에 현혹되어 넘어간다. 반우는 이러한 현실을 알고 은호에게
그럴때가 아니니 네 길을 찾으라고 말하지만 젊고 혈기에 왕성하고 의욕 넘치는 은호에게 그것이 귀에 들어올리 없다.
결국 반우를 배신아닌 배신하게 되지만 높은자리를 쉽게 올라가면 떨어지는것도 아픈법이니
그것을 깨닫게 되지만 원로 사진 작가 반우는 이미 많은 경험을 해왔기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기회를 손쉽게 잡는다.

젊은 작가 은호도 다시 기회가 올때가 있을것이고(안올수도) 그러한 사이클을 한번 경험했으니
몇번의 되풀로 굳은살이 생기는, 사회에서 성공의 쳇바퀴를 단편적으로 그려낸다.
이 셋과의 관계는 많이 보이기도 하고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을 다룬 작품들은 많다.
하지만 보통은 기성세대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서 시샘으로 신세대와 결별하는 내용이 흔한데
이 작품에선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단면이라도 가르쳐 주지만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는 점을 강조한다.

젊은이의 혈기로 실수 하는것을 그 스승이 떠안게 되는 장르도 없는것은 아니지만
연극에서 두 사진작가는 스승과 제자라는 표면보다는 동료관계 같은 심리가 깔려있어보인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는 다른 흐름이 보여서 그동안 봐왔던 전개와는 조금은 다른 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동물의 관점이 새로 들어온다.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닌데 제가가 스승의 작업을 촬영하는 것 또한
다른 시선을 표현하는거라서 이 연극의 주제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흘러가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 사람과 다른 매체 등 다양하지만 일관된 두개의 선을 나타낸다.

반우가 은호를 보는 시선과 은호가 반우를 보는 시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
작가가 보는 멸종위기에 빠진 새와 인간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새가 작가를 보는데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부분에서 조금은 독특한 사고가 생겨나는데 사회에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점차 퇴색되고 있는 지금에서 이러한 주제를 걸었다면, 집단이라는 인간사회가 파편화 되는 과정속에서 나오는
회기본능의 일종인지 신세계를 맞이하기 전 마지막 회상이라는 형식을 빌어 떠나보내는 예우의 과정일수도 있다. 
작가의 생각이 무엇이든 분명한것은 무엇인가는 멸종위기에 처한것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존재의 오만함이 묻어있다는 것이다.

몰입감이 뛰어나고 호흡도 좋다. 매체도 다양하게 활용하여 보는 재미도 뛰어난
훌륭한 연극이었다. 다음에 또 볼수 있으면 좋겠는데 언제 할런지.

출연 : 최희진, 박용우, 송석근, 최도혁, 신윤지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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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1일 일요일

연극 -몸 기울여-

 

하얗고 어두침침한 조명, 차가운 콘크리트 구조물. 고기같은게 걸려있는 배경
공연20분전부터 입장인데 20분 기다리는게 어딘가 힘들게 느껴진다.
묵직한 무대 디자인때문이었을까.

전체적으로 주제가 나뉘는 소재를 생각해보자면
사이코패스, 집단괴롭힘, 이기주의, 동물에 대한 이중적사고(캣맘?), 권력비리, 회피?
이정도 되는거 같다. 다양한 주제 하지만 한쪽에만 치우치진 않는다?

고깃집은 단순 배경일까? 괭이를 재미로 죽이는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살육하는것과
상반된 사고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일까? 고깃집인지 정육점인지 잘 모르겠다.
발골한다고 하길래 처음엔 도살장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거 같다.(정육형 고깃집 같음)

시작은 기르던 괭이를 잃어버려 찾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중간에 떡하니 덩치큰 사람이 앉아있어서
스릴러 호러, 고어물같은건줄 알았다. 도살장을 배경으로 하는 그런류?

잃어버린 괭이를 배경으로 사건이 엮여이게 되는데 과거 또한 괭이부터 시작한다.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일깨워준 동내 양아치들.
그들은 이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동물 학대도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단순한 동내 양아치처럼
살아가는 존재들? 일을 하며 살아가는거 같은데. 늬앙스는 양아치 아닌 양아치.

사이코패스인 동파만이 군수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지만 야망이 있는 인물처럼 보이진 않는다.
왜일까? 공인으로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괭이를 죽이므로서 기분전환을 하는데
이 사람은 왜 정치인이 되려는 것인지. 그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다.
괭이를 죽이는것 빼면 그냥 청렴해 보이는 선출직공무원인 사람이었다.

은연중 알게모르게 난폭함이 나타나긴 하지만 오랜 동내 친구들과 즐기면서 나오는것이라면
뭐 그냥 납득이 안된다고도 할 수없다.

다른 친구들도 그다지. 경찰도 그렇고 괭이를 잃어버려 매일 찾으러 다니는 친구 홍인도 그렇고

사건을 만드는 두 종류의 인간이 나오는데 (이 두 종류가 이 연극의 본질인지는 모르겠음)
한 사람은 전형적인 동내 양아치. 어떻게든 동파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한다.
동파가 괭이를 죽이는 장면을 다른 친구와 찍어서 협박하여 동파는 사이코패스에서 부패한 정치인으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

다른 한사람은 내가 보기엔 캣맘이다. 전 남편(홍인)을 계속 가스라이팅 한다.
주는 고기는 잘 먹으면서 야생괭이에게 계속 먹을것을 줘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전 남편을 궁지로 몰아넣는 답답함이 있다.
(홍인은 괭이를 찾기 위해 이 여자를 불러온것이지만 잘한것일까?)

괭이도 전남편이 키우다가 실수로 집밖을 나갔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한다. 부부도 아닌데

아마도 두 캐릭터가 이 연극에서 가장 큰 줄기로 나뉘게 되는거 같다.
동내 양아치와 남을 생각하지 않는 캣맘의 이기적 형태
이 둘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용당하는 모습?

사회 부조리를 만드는 존재들은 언제나 소수다.
자신이 갖은 힘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소수의 인물들.
한국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는것은 과연 대중일까?란 생각에서 이 연극은 또 다른 단면을 생각하게 해준다.

폭력으로부터 생겨난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한 인물인 동파도 특이하고
칼 가는것에 집착하는 고깃집 발골맨(정형사) 괭이 주인 홍인도 그 속이 약간은 어두침침하지만
열린결말이라고 해야 할까?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뽀족한곳으로 모이는 맛이 전혀 없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데 왜 '몸 기울여'라는 제목이 붙은걸까?
연극에선 생각보다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두 인물을 제외하면 그다지 다른 길을 열어놓지 않는다.
한곳으로만 몰아넣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것일까.

전체적으로 다양한 주제를 지니고 있어서 자칫 산만할수도 있지만
주제들은 각 단락마다 섞이지 않으며 깊이있게 논한다. 그리고 생각할 여유를 준다.

110분간 고조되지 않는 긴장감속에 진행되는데 조금 아쉽다면 뭔가 터져야 할거 같은데
터지질 않았다는것이다. 사이코패스가 보여야 할것들이거나. 괭이 주인의 터져나오는 증오심과 폭력성?

끝은 좀 허전하다고 할까? 그래서 좀더 생각을 하게 되는 연극이긴 했는데
세상이 멸망할거같이 분위기를 잡아놓고 좀 독특하게 마무리되는걸 보면 좋은 연극이긴 한데
꼭 찝어서 뭐가 좋다고 하기도 어렵고 아무튼 훌륭한 연극이었다. ^_^

출연 : 김상보, 유독현, 조형래, 강혜련, 홍성민, 박상윤, 임솔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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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8일 일요일

연극 -풀(POOL)-

 

어제도 좀 무거운 주제였는데 오늘도 본의아니게 묵직한 연극을 고르게되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진 못하고 예매했어서 연이어 주제가 쉽지 않은 연극이
골라지는 경우가 흔하진 않지만 어제와는 많이 다른 느낌의 연극이었다.

일단 황당한 1인다역 극이 아니라 확실하게 1일 1역에 충실한 일반 연극이다.

장르는 이런걸 SF라고 해야 하나? 심리추리물이라 해야 하나?
일단 배경은 일부 기억을 지울수 있는 시대이다. 일부의 시간만 무로 만든다?
다른 기억으로 채워넣는것도 아니고 완전히 소거하는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코마상태(혼수상태)인 사람들을 치료하는 가상세계
이와 비슷한 영화로 2020년에 나온 '코마(Koma)'라는 것이 있지만 좀 다르다고 볼 수도 있고
배경을 컴퓨터로 만들었냐?정도지만 아무튼 그러한 배경이다.

여기엔 NPC(게임 진행을 위한 보조 캐릭터로 Non-Player Character의 약자) 셋과 연구원 셋이 나온다.
첫 알파테스트(개발 완료 후 최종 시험을 내부적으로 하는 시험, 베타테스트는 공개하여 대상자을 상대로 시험-출시 최종 버전-)를
하게 되는데 여기엔 연구소장이 직접 가상세계에 뛰어든다.
여기까지는 SF물인가?싶었다. 그런데 시스템이 이상 동작을 하고 이러저러 소장이 예상한대로 진행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것에 흥미를 느낀 소장은 시험을 멈추지 않고 진행한다.
(저예산 SF물들의 비슷한 플롯일까? 신선함은 크게 없다.)

현실에선 조수1,2 두명이 분주하게 움직이는거 같지만 실제론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냥 대화속에서 배경설명을 곁들일뿐 소장이 그 안에서 죽던 살던 밖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스템을 이렇게 설계하진 않을텐데 가상세계를 시험적으로 들어간 사람이 완전한 통제권을
지니고 있다는것은 자살하겠다는 심사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런건 문학적 허용쯤으로 넘겨보자.

코마상태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함이라고해서 개개인의 기억 정보들이 들어가 있는거 같은데
기억소거 시스템과 연결되어 데이터를 가져오는 구조였나보다.
(알파시험에서 메인데이터를 날릴수 있기때문에 보통 더미 데이터만 사용하지 이렇게 연결하진 않음)

가상세계의 시스템은 데이터를 로딩하다가 뭔가 문제가 발생하고 예상과 다른 어떤 데이터가 불러와진 후
무엇인가 세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NPC1,2,3가 그에 맞도록 설정되어 해결해나간다는 구성이다.
초반이 좀 지나면 어떤식으로 흐르겠구나~라는게 그려지는데(이런 예상의 절반은 틀림)
그 예상에 크게 벗어남 없이 흘러간다. 약간의 소소한 반전같은게 좀 있는정도?
나는 혹시 조수2의 누나 기억이 잘못 로딩되어 코마상태인 누나의 기억속을 파헤치는건가?란
생각도 했었지만 역시나 원래 생각대로 진행된다.

인간의 경험적 기억과 그의 연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가.
이것까지는 그려내고 있진 않아보인다. 그냥 소장의 과거를 다시 꺼낼뿐.
소장이 자신의 기억 일부를 지운것은 그 만의 이유가 있었을텐데
이 시스템은 그걸 모두 되살려놓는다. 무엇일까? 기억 소거가 증가하면서 코마도 같이 증가했다는 대사가 있는데
기억 일부가 소실 되었더라면 그의 연쇄적 반응으로 뇌의 다른 기능들이 폐쇄되어 코마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일까?

뇌 과학에 대해 잘 모르기때문에 어떤 이론을 근거로 이런 결과에 도출하는지까지는 모르겠다.
물론 설명해준다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테고 기억도 안될것이다.
연극의 흐름역시도 결과와는 거리감이 있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것이 너무 힘들어서 기억을 소거한것까지는
저 사람의 결정이니 존중하는데 도데체 왜 기억을 살려내야 했냐는것이다.
코마상태인 사람들이 이런 가상세계에서 미션을 수행하며 자신의 트라우마같은 기억을 다시 되살린다면
코마상태가 아니라 거의 가사상태가 되다가 사망하는거 아닌가?

미션 클리어라는 것이 어떤의미였을까? 과연 이 AI는 인간에게 어떤것을 선택하도록 한 것일까?
죽음? 회생? 좌절? 희망? 의지?

뇌 과학에 대한 지식이 미천해서 저들의 흐름은 SF물 같이 좀 허황된 느낌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SF물의 허무함 같은거랄까?) 프로젝터를 활용해서 어려운 특수(?)환경도 표현하려고 하긴 했는데
뭔가 훨씬 더 다양하면서 그럴싸한 배경을 영상으로 설정할 수 있을거 같은데 단조로운 설정이 아니었나싶다.

그리고 무대가 중간에 있고 무대를 둘러싸고 양쪽에 관객석이 있는데
제발 이렇겐 하지 말자. 이러면 배우가 관객을 등지게 된다.
충분히 큰 극장이지 않은가? 마음껏 뛰어다닐수도 있고, 관객을 많이 앉혀도 불편함 없는 좋은 극장이니
확실히 관객을 주시할 수 있고, 관객도 배우의 얼굴과 대사에 집중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길.

주제를 곱씹다보면 묵직할수 있지만 너무 처지지 않도록 코믹함도 어색하지 않게 잘 섞여있어서
힘들지 않고 무겁거나 불편함을 덜 느끼도록
그러면서도 천천히 여유있게 생각할 수 있는 훌륭한 연극이었다.

출연 : 김정, 신윤지, 김정화, 신정원, 김별, 류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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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3일 토요일

연극 -서재 결혼 시키기-

 

왜 제목을 헷갈리게 앤 패디먼 작품과 똑같이 했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제목을 같게하면 연극을 보려하는 사람들은 헷갈릴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다는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으로 보이진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가족들의 삶을 이야기 하는것인가?싶었지만
생각보다 그런 내용은 극중 김수영(정신상담사)과 송예은(송해원의 동생)이 그 부분을 담당한다.
주인공이자 서재의 주인인 현성주(남편)와 송해원(아내)은 이런부분과는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한다.
(송해원이 나오는 것은 회상 일부와 현성주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인물임)

이미 식어버린 서로의 감정. (식었다기보다는 풀지 못해 엉킬대로 엉켜버려 더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
헤어진 상태에서 송해원이 자살을 했다는건지 사고사인지도 솔직히 불분명하다.
자살과 사고사는 감정의 상처 크기에서 다른 느낌을 줄텐데 작가는 크게 개여치 않은거 같다.
단지 현성주의 감정상태에서 집중하도록 모든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래서 동생의 아픔이나 정신상담사의 감정상태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는 경향이 크다.
김수영의 누나도 자살을 했다는데 현성주는 짜증난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후벼판다. 저 친구가 곁에 있는 이유를
분명히 직시하고 있음에도. 이런점에선 우리들의 흔한 인간의 감정을 직설적이면서 멋지게 표현하지만
이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나몰라라 해버리게 되버리는 세상의 중심에 나 밖에 없는듯한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는듯한 이기적 성향의 인물로 표현된다.

개인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한것이 인간이고
성주라는 인물은 이 모든것을 조금은 강하게 묘사되어 연극이니 그러겠지라고 넘긴다기보다는
관객인 내 감정은 너무 자기방어적인데 라는 기분이 훨씬 앞섰다. 그러니 성주의 모든 말들은
매우 논리적으로 대하는거 같지만 이 모든것은 무엇인가로부터 감추려는듯한 행동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극의 전체적인 흐름은 그렇게 신선하거나 새롭다거나 한것은 없다.
단지 대사들이 논리정연하다보니 이런것이 맞는 사람은 대사에 집중하게 되고
감정에 좀더 치우친 관객이라면 조는 경우가 생기는것일거다. (조는 사람도 제법 있어보임)

흐름자체는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듯(적어도 스릴러가 아닌이상)한 한 사람
그 감춰진 감정을 토해냄으로 봄에 눈녹듯 모든것이 해결되는 참 별볼일 없는 전개인데
장장 3시간동안 단 한 순간도 나는 저들에게서 시선을 놓을수 없었다.
일단 대사에 집중을 안하고 놓치게 되면 바로 잠이 올거 같은 긴장되는 흐름속에서
대화 주제 역시 논리적이면서도 주제를 놓치 않고 치밀하고 깊게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는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아쉬운점은 한 순간에 모든 해결이 되 버렸다는 어이없는 상황이란것인데
그게 그렇게 바로 정점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었는가?다. 호흡도 가다듬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게 아니라
2시간50분동안 평지를 숨가쁘게 걷다가 1분만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까지 가서 9분동안 계단으로 설렁설렁 내려온 기분이랄까?

이 마지막 1분이 없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성주가 계속해서 벽을 허물지 않고 꽁꽁 싸매고 그대로 남들앞에서 멀쩡한듯 있다가
그냥 끝나버리는것은 이상했을까?
우리의 현실에서는 보통 그러지 않나? 한번 엉켜 더이상 풀수 없게 되면 그대로 방치해버리지 않나?

특이하지만 이렇게 깔꼼(?)하게 모든게 해결되는 연극은 꽤나 남는게 없다.
3시간가량을 미친듯 집중했는데 극장을 나올때는 이리도 홀가분하고 텅빈 감정으로 나오다니..(이게 좋은건지 그렇지 않은건지)
아무튼 기회되면 꼭 한번 보시길 권하고 싶다. (시작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함)

그리고 제목처럼 '서재 결혼 시키기'는 원작 앤패디먼 작품을 읽어보는게 나을거 같은 기분이다.
(이 연극의 서재결혼시키기는 글쎄 뭐 그다지)

나도 적당히 큰 내 서재 하나 갖고 싶다. 그러면 지금보다 책을 훨씬 많이 샀을텐데..(읽는건 싫어함)

출연 : 이강우, 김희연, 정세환, 한수림

2025년 11월 30일 일요일

연극 -하얀 봄-

 

이번이 두번째 보는것인데 예매할때도 몰랐고 볼때도 초반엔 몰랐다.
중반쯤 되서야 아~ 본거였구나. 싶었고. 올해는 아르코쪽에서 동성애 관련 연극에 집중하는가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 연극은 사실 그런것하곤 거리가 있다.

세대간의 벌어질수 있는 이해의 장벽같은 존재.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하지만 그 시절 모든것을 담고 살았음에도
새로운 올챙이와의 상반된 사상들. 지향했던 삶과의 괴리, 왜곡과 굴곡
이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제되고 있는 세대간 갈등의 문제일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일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사람을 현혹시켜 인위적으로 갈등을 유발한것이지
연극에서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필연같은 현상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극중의 배경 세대와 나와는 거의 같은 세대기때문에
연극을 보는내내 나의 행동이 지금 세대들에게 상처를 줬던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계속 곱씹게 된다.
그러면서도 연극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왔다 갔다 하는데(플래시 백이 좀 많지만 극단적으로 나뉘어서 헷갈리진 않음)
그와 동시에 나도 나의 과거 시간으로 왔다갔다를 해본다.
주말에는 어김없는 최루탄냄새로 친구를 만나려고 시내를 나가면 언제나 코를 막고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연극 속의 그 격동기는 아니었다. 조금 흐른 김영삼-김대중 정부시절무렵이 내겐 20대였으니
김영삼정부때를 회상해보면 무언가 흥청망청 여유있는 시대였던거 같긴 하다. 하지만 내 환경은 부유함보단 빈곤함에 훨씬 가까웠다
바로 이후 IMF를 정통으로 맞았지만 워낙 저임금 직장이었기때문에 타격도 없었다. 더 내려갈수 없는 바닥.

내 바로 윗세대인 486세대가 이나라에서 제대로 민주화 학생운동을 했던 세대들이었을것이다.

이 연극의 내용도 이 세대를 주 타켓으로 하지만 연극이 나온 시기를 생각하면 이제는 같은 기성세대가 되버렸기때문에
저 교수(연수)가 고통받고 이해 못하는 그 벽이 이해되려하고 하고 있다.
젊었을때 추구하던 무엇들. 그것을 깊이 간직하고 살아왔으나 이미 주변은 모두 퇴색되어
당시 타파하겠다고 목청 올렸던 바로 그 세대가 되버린 환경. 그러나 나(연수)는 계속 이어가고자 했는데
어이없겠도 지금의 젊은 세대가 그것을 거부한다. 무엇이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바꿔버렸을까?
망가뜨려버렸을까? 내가 망가진것일까? 저 학생이 망가져있는것일까?
모든것이 조심스럽지만 모든것이 이해 안된다. 동시대의 친했던 친구도, 지금 세대가 나(연수)를 두려워 하며 고소한 학생의 이유도

나로서는 어떤 결론을 내주길 기대하지만 내가 못 찾았던, 내 길이 맞는지 증명받고 싶은 마음에
끝엔 어떤 해답을 원하지만, 연수 역시 아무런 해답을 찾이 못한다. 나 역시 극장을 나올때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해답도 갖질 못하고 나올수 밖에 없었다.

관객에게 너무 무겁고 많은 질문을 던지는 훌륭한 연극이지만..
아직도 좀 이해는 안된다. 학생이 시간강사를 두려워 하나? 전임교수도 아니고 문제생기면 다음학기엔 웬만해서 보기 어려운 강사에게?
학점이 엄청 좋아서 학점관리를 해야 할 사람이라면 그렇다고 하지만 성적도 별로인 친구가?
설정 배경은 좀 이해는 안된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이미 늙었기때문에 이해 못하는것일수 있다.
경험이 적은 젊은 세대는 훨씬 예민하고 나약할수 있는데 젊다고해서 무조건 무모하게 덤비거나 하는것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이게 나의 세대때와 지금의 세대의 어떤 행동양식이 달라서. 그 형태를 내 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워 한다.
반대로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를 이해못하는건 마찬가지겠지. 오히려 이건 당연할거 같은데
왜 나는 저들을 이해 못하는 것인지.. 그냥 젊어서 저러겠거니라고 치부 해 버린다.
보기 싫어서 회피하는거 같아 마음에 드는 행동은 아니지만 이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참 우낀것이 연극에서 연수의 젊었을때의 사랑도 꽤나 어설프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는 참담하다. 이것이 미래의 연수에게까지 이어지는데 이건 누구나 비슷하지 않은가?
무엇인가 한창 어설플 나이때. 그때의 것이 생각보다 바뀌지 않고 늙을때까지 이어지는 어리숙함.

어쩌면 인간의 시간은 생각보다 이러한 결점을 고치기엔 너무 짧게 주어진 단편이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훌륭한 연극이었다. 무대 효과나 장치들이 좀 섭섭하긴 했지만(좋은 무대인데 좀 장치들을 다양하게 활용하지)
지난번에 봤을때와는 조금 다른 생각, 아마도 내년에도 보게 된다면 오늘과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거 같아서 기대된다.

출연 : 옥자연, 장선, 송치훈, 박다미, 황재성, 최강현, 김관식, 이서한, 최수현, 김하정

-추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극단 공연의 티켓가격은 최저임금 두배를 넘지 말자




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연극 -청송-

 

퀴어영화였다니.. 기본적으로 성소수자를 말하긴 하는데
간간히 정동극장도 그렇고 이런류를 무대에 올리지만 정작 퀴어하곤 크게 관계없다.
물론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때문에 당연히 성소수자긴 하지만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파해치거나 사회고발한다거나 하는게 아닌 그냥 멜로물이다. 이번 역시 거의 다름 없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퀴어 하면 동성애자들만 대변한다. 남여자동성애자 이들은 성소수자라고 하기엔
좀 많지 않나? 오히려 성소수자가 아닌 성비주류 라고 하는게 맞지 않나? 물론 퀴어에서도 빠져야 하고.
그리고 퀴어에 왜 양성애자가 들어있는걸까? 그리고 무성애자는 또 왜? 무성애자를 놓고 누가 뭐라 하나?
사회적 편견이 있어서 불이익을 받는 부류였던가? 세력을 키우려고 이런부류까지 억지로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퀴어에 인간적으로 양성애자(이들은 엄밀히 봐서 욕심쟁이들이지)와 무성애자는 빼자.
아마도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탄압을 받는 대상은 트랜스젠더겠지만 절절한 영화나 연극을 본 기억은 없다.
동성애관련은 남녀 모두 영화도 훌륭한것들이 많아서 연극도 유명한 작품이 나올법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멜로정도로 가볍게 접근하는거 같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남자동성애를 다루는 연극은 아직 못본거 같다.
여자동성애는 한국사회에선 그나마 상대적으로 덜 비아냥 거리는 반면 남자동성애는 도를 넘는 차별이 많아보이는데
남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국사회에선 그렇다. 관객수도 엄청난 차이가 있을듯도 하다.

연극에서 청송은 지역을 말하는데 외진곳인지 이들은 이곳에서 퀴어라는 단어를 못 들어봤다고 한다.
 TV가 있었을텐데.. 나도 TV에서 처음 이 말을 들은거 같은데.(애초에 관심 없는 주제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공부를 잘했다는 영주는 대학을 못들어가서 청송에 남고 가윤은 대학에 들어가서 서울로 상경했다.
서로 그렇게 좋아했다면 영주는 서울에서 재수 학원을 다니면 서로 헤어지지 않아도 될법 했지만
차별의 시선이 두려웠을까? 청송은 어차피 사람도 많지 않으니 둘만의 관계를 유지할수 있었겠지만
(내가 지금 서울을 못떠나고 어떻게든 여기에 남아있는것도 다른곳에 대한 두려움때문인데 비슷한건가)

서울에서 새로 만난 연인 은하. 이 캐릭터는 호방하다. 말 그대로 있는집 자식인지 사회생활을 하지도 않았는데
오피스텔이 있어서 가윤을 대리고 와 동거를 하면서 이 둘이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청송에 남아있는 영주. 그런데 영주는 가윤을 기다리는건가? 나(이산)역할이 계속 상황을 나래이션 하다보니
오히려 낭독극도 아닌데 좀 어지럽다고 해야 할지 산만하다고 해야 할지. 이 사람은 미래의 가윤인건지
저 가윤은 나의 과거의 나인지. (과거의 나를 회상하는거 같긴 함)

가윤은 사랑을 한것일까? 아니면 신분상승을 원했던걸까? 지상으로 나가고자 했던게
물리적 반지하 집에서 고층 오피스텔로 전환 되었지만
정작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말한것은 없다. 오히려 반대로 철저하게 감추었을뿐
이걸로 보면 가윤은 영주와 은하를 이용 대상으로만 선택한 것인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반지하로 되돌아온것은 그것이 온전한 내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되었기때문있었을거 같다.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처럼 쿨하게 훌훌 털고 그냥 지나가면 되는건가?
인생이란게 다 이렇게 한쪽으로 밀어내며 살아가는거긴 한데
무엇이 주제인지 모르겠고 왜 이런 연극에 퀴어라는 명사를 자꾸 써대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퀴어 어쩌구 저쩌구 하면 여성관객들이 확실이 많이 보인다. 오히려 연인관객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이러면 퀴어연극이라도 퀴어라는 수식어를 최대한 빼서 남녀 모두를 보게 해야 할텐데
연출 자신은 관객이 많이 몰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것일까? 아무리 봐도 그냥 멜로물..

성장통 드라마의 플롯을 그대로 답습하는 아프고 고민하고 어려웠던 한때의 사랑 기억들의 몇조각 정도를 나열한것뿐이니
뭐라 말해야 할지 좀 난감하다.

그런데 영주는 뭐하고 있으려나. 오히려 이 사람이 훨씬 매력적인 인물인거 같은데
아직도 청송에서 살고 있나? 가윤은 청송을 왜 그렇게 증오를 했을까?
아무래도 결론은 삶의 질(돈)때문이었겠지. 그러니 누구는 좋은곳으로, 다른 누구는 꼴도 보기 싫은 곳으로 기억되는거겠지 

출연 : 김섬, 박은호, 이산, 정제이




2025년 6월 28일 토요일

연극 -세기의 사나이-

 

세기의 사나이? 한세기를 산 사람의 이야기다.
물론 근현대사를 두루 거친 한 인물의 이야기고 당연하게도 허구의 인물

허구의 인물이라고 하기도 좀 그런것이 얼마전까지 위안부 성노예로 끌려간 할머님께서 TV에도 나왔으니
실존 인물이 있을수 있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할게 없어보이는 우리들이 포함된 시대이다.
그만큼 일제강점기는 한국역사에서 그리 오래된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친일매국노에 대한 처벌은 미비한 수준
그 세력이 아직도 득세하여 난리를 치고 한국을 망치는 주된 인물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강건너 불구경같은 관람은 쉽지 않게 다가온다.

박덕배(주연)라는 인물이 장수하게 된 배경이 다소 판타지나 오컬트 스러워 마음에 드는 설정은 아니다.
이렇게 제3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면 인간의 역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고 그것을 지키려 했던 모든 사람들의 노고도
휴지조각만도 못한게 된다. 특히 이번 설정을 보면 죽어서 다 만나볼거 뭐하러 독립운동을 하고 뭐하러 싸우는가
일본은 왜 한국을 침략하겠나. 어차피 저승에 또다른 삶이 존재하는데. 그래서 이런 엿같은 배경설정은 참 그지같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신명'도 작금의 현실을 오컬트와 접목시켜서 국민들이 목숨걸고 지켜온 세상을
귀신들의 장난쯤으로 취급해버려 욕을 먹는데 이 연극도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물론 이 연극은 귀신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바꿔놓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박덕배는 일반 평민으로 삶도
그다지 돋보이지도 않은 흔하고 평범한 인물이다.

다만 그 주변에 친일매국노, 독립운동가로 나뉘고 해방후 공산주의자가 되어 북으로 간 사람 남에 남은 사람들
서로가 총질하는 한국전쟁까지 다양한 지인들을 포섭하고 있을뿐 큰 역할을 하는 인물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연극을 재미있게 하기 위한 감초역할정도에서 그칠뿐이다.
동분서주하긴 하지만 전체 현대사에서 어떤 간섭이나 영향력도 발생하지 않았다.

조선말기에서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한 평범한 인물이 겪는 한국의 근 현대사를 다룬다는 정도라서
너무 많은 한국의 격동기를 모두 다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근 현대사 대부분을 다룰거 같지만(박덕배도 거의 현재까지 살다가 감) 막상 한국전쟁 이후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게 한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화 예술의 전반적인 문제다.
왜냐하면 박정희 친일매국노 세력들부터 쿠데타 세력들이 고소 고발을 해대는 통에 한국의 현대사중 한 50년은 사라져버렸다.
적어도 공연예술분야에서는 흔적도 거의 없는 편이다.
기껏해서 박정희가 총맞아 죽는 것이나 전두환 군사정변(쿠데타) 당일 정도.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도 극히 없다.

심지어 이런 내란범들을 다루는데도 사자명예훼손 운운하며 정지시키려고 지랄발광들을 한다.

예전에 역사 강의를 듣는데 근 현대사는 총 15강중 1강(1시간)도 해당되지 않는 병신같은 구성을 보이는데
이 한시간 구성조차도 대부분 그냥 지나간다. 이런 구성은 한국사회 전체에 만연하게 퍼져있다.

이 연극도 다름없다. 박덕배라는 파란만장한 저 인물은 125년을 살면서 일제강점기에 딸을 잃고 한국전쟁때 동생이 북으로 가고
자식처럼 키운 다른집 애들 둘이 서로 갈라져서 총질을 하는 비극을 겪은 후 박덕배는 평화로웠나보다.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516군사정변(박정희), 1212군사반란(전두환) 등 한국전쟁 못지 않는 굵직한 사건들이 여럿 있었고
그 사이에도 계속되는 탄압으로 일제강점기나 다름 없던 시기도 있었는데 그 어떤 사건도 다루지 않는다.
왜일까? 저 놈들의 힘이 아직도 멀쩡하기때문일까? 지원금을 받기 어려울까봐 미리 눕는 풀이었을까.

최근에 군사정변을 일으키려던 윤석열도 살짝 다루면 좋지 않나?(계속 큰 사건들이 있으면 업데이트 되는 형식으로)

내 바로 앞줄엔 초등생 같은 아이도 보러왔던데 이정도 세대라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같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러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도 함께 보여주면 안되었을까?
예술은 혁명이고 반항이며 역사인데 겁이나서 먼저 누우면 어쩌나...
멀게 느껴지는 어느시점의 사건들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보라는 의미였을까.

그래도 내년을 기대해봐야지..
혹시 아나.. 세기의 사나이가 조금더 살아서 윤가놈 사건도 보게 될지..

출연 : 아주 많음




2025년 6월 11일 수요일

연극 -은의 밤-

 

대학로예술극장 중 특히 대극장은 크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시설도 좋다.
아르코극장은 좀 세월이 흐른 느낌이 들지만 이곳은 훨씬 현대적으로 만들어진곳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연극일까
특이한것은 이 연극을 작년엔 혜화당 소극장에서 했다는 것이다. 아~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거 아닌가?
그도 그럴것이 연극 대비 무대가 상대적으로 커보인다. 출연자가 많은 연극이긴 해서
혜화당같은 소극장에서 어떻게 공연했을까?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할만한 극이었을까?
물론 어떻게 무대를 꾸미고 어떤 구성 하냐에 따라서 가능할듯 하긴 하지만
지난주에 봤던 좁디 좁게만 보였던 공연인 '강제결혼'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이런걸 보면 이쪽 세계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알력이란게 존재하는걸까.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흘러가지만 솔직히 모르는 내용이다.
무엇을 말 하려 하는지 주제가 도통 보이질 않는다.
비엣남 전쟁인가? 어느 전쟁을 배경으로 한거 같긴 한데 그것을 관객이 알필요는 없는것인지
부연 설명같은것은 없다. 그냥 과거 어떤 전쟁에서 강간인지 사랑인지(내용상 강간 같음) 말 못하는 정신지체인(아니타)이 임신을 하게 됬고
그 사람과 단짝같은 눈먼 여인(이다)은 아니타와 전쟁을 피해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다가 군인에게 강간 당하는데 갑자기 배가 불러와서 어떤 여자가 막 몰아붙치니 마지못해 마을을 떠난다.
이 마을의 피신처에서 수 개월을 있었던가? 전쟁통에 다들 어딘가에 피신해 있는데 몇개월씩이나 있다고?
뭔가 상황이 맞지 않지만 극적 허용이라 치부하며 넘어가더라도.. 이다는 자신의 친구인 아니타를 강간한 그 군인을 사랑하는지
정신적으로 의지하는지 군인이 부대로 복귀하려하니 같이 떠나자고 설득 한다.
이부분에서도 여자가 배가 불러올정도로 시간이 흘렀는데 부대 복귀를 한다고? 이정도면 전시때 탈영은 사형인데
작가가 이런걸 전혀 모르고 있는건가?
대충 이렇게 흘러간다. 뭔가 배경지식이 필요한 연극인것인지
저 아이들(이다, 아니타)은 왜 마을에서 쫓겨난것인지
전쟁중에 탈영자가 발생할수 있긴 한데 마을 피신처에서 총까지 마을사람들에게 맏겨둔 상태에서 강간을 하고 몇개월을 그냥 보낸다?

이다는 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군인은 어쩔수(?)없다는 이상한 변경을 늘어놓는다.
어쩔수 없다는 것은 심리상태가 너무 불안정했기때문에 강간할수밖에 없었다는건가? 이게 뭔소릴까?
(작가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이런 변명을 탈영병에게 떠안긴것일까)

임신한 말못하는(난 아직도 아니타가 왜 말을 못하게 된것인지 알수 없다. 선천적이진 않은거 같은데) 아니타의 뱃속에 있던
한 아이가 장군이 되어 다시 전쟁을 한다는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 두 세계가 비슷한 형태로 지나간다.
현재는 장군이 되어버린 아니타의 아들이 전쟁을 합리화 하고 그의 아내는 전쟁에서 피해보는 이들을 살리겠다고 하는데
누구를 대변하는지까지는 모르겠다.

이 나라는 어떻게 생겨먹은게 어머니 시대때부터 그의 아들이 자식을 낳아 자식들이 장성할때까지 전쟁을 하고 있는걸까?
비엣남(베트남)전쟁도 20년간 전쟁을 했으니 이곳은 아닌거 같고 어느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것인지

그러면서 시종일관 말도 안되는 밤이 되면 은빛으로 물드는 마을 얘기를 처하고 있다.
그 은빛은 아마도 시신들의 뼈에서 반짝이는 인(도깨비불같은)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싶긴 한데
아이가 가지고 놀았던것도 뼈라고 하는걸 봐서는 뭐 대충 그럴수 있긴 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것인데?
전쟁의 참혹함과도 솔직히 거리가 한참 멀고, 대를 이어 반복되는 인생을 표현하는건가?
전쟁으로 인간의 잔인, 참혹, 처절, 참담, 변명, 합리화 모든것을 보여주는것도 아니다.
저 산을 너머가면 무엇이 있길래 두 소녀는 그곳으로 가려했던것이고 탈영병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안간 이유는 또 무엇인지.. 그리고 총 맞아 죽었지만 배를 갈라서 아이를 살린다는 황당한 사고는 어디서 나온것인지
그것도 10대 소녀가.... 혜화당에서 눈앞에서 연기하는걸 보면 훨씬 뭔가 와닿았을까.
음향 조절도 이상해서 몇번이나 사람을 놀라가 하고(공연에서 놀라게 하는건 좀 지양해야 하지 않나?)
너무 멀고 큰 무대가 안어울리는 극이었을까? 내가 이해력이 똥이었을까..

출연 : 김신실, 장영주, 장필상 외 많음




2025년 4월 19일 토요일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The Clown(광대)-

 

아~ 1인다역 끝판왕인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너무 좋아하는 고전 중 하나다. 엄밀하게 보면 책보단 1968년작 영화(올리비아허시주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레오나르도디카프리오 주연의 현대물이 아닌 고전 원작 그대로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 책을 읽어도 오버랩이 거의 완벽하게 되고 이질감도 없다. 거기에 올리비아허시의 아름다움까지
대사 하나 하나가 곱씹다보면 주옥같지만 다르게 보면 그냥 풋사랑의 절절함이라 해야 할까. 아~ 그래도 그 사랑은 그립다.

그런데 그 원작 대부분 그대로를 옮겨놓은거 같지만 표면적으로 아주 많이 뒤집어놨다고 해야 할까?
오케스트라작품을 듀엣용으로 편집을 했다고 해야 할지
보는 내내 내용 그 자체보단 다수의 인물을 단 두명으로 그려내게 만든 편집(재창작) 능력이 돋보이는 극이었다.

영화를 좋아하고 비극인 만큼 너무 슬프기때문에 아무리 광대들의 놀음이라 할지라도 그 끝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겁지 않을수 없어서 코믹극에서 눈물 흘리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는게 조금 뻘쭘하지만
두명의 광대는 그 복잡미묘한 비극을 연기하면서도 로미오와 줄리엣 특유의 사랑을 빼놓지 않는다.
다만 뭐랄까? 몬테규와 캐플렛 두 집안의 긴장감이 좀 없다고 해야 할까?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상황을 두 광대가 코믹으로 변화시켜서 약간은 정신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몇 사람의 역활을 맡기때문에 계속되는 배역 바뀜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집중하기엔 쉽지 않았다.

나는 이 두사람의 감정선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이들의 암울한 운명을 보다 넓고 깊게 헤아리고 싶은데
배우 한사람 한사람에 시선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니 웃으면서도 어려운 연극이었다.

왜였을까?
왜 졸렸을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아니면 몰입감이 감소되는 몇몇 요인들때문?
두명의 훌륭한 배우들이 모든 배역을 소화함에 있어 관객인 내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도 여러번씩 읽고 영화도 여러번 봐도 별로 질리지 않는 작품인데 단 90분짜리 연극인데 몇십분만에 지친다고? 

한두번 더 보고 싶긴 한데 너무 슬프기도 하니 내년에 또 해주길 기대하는 수 밖엔

그리고 이 연극의 특이한 점 한가지는 비극을 희극(?)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광대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니 이들은 이것을 과감히 뒤틀었다. 그렇지만 별로 감흥은 없다.
예전 어떤 교수가 그랬듯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았다면 이혼했을거라는것에 동의한다.
사랑은 언제나 애절할때까지다. 사랑은 간절함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가 가장 아름답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 정점에서 죽었고 춘향가에서 춘향이가 옥에 갇혔을때까지가 그때다.

그런데 해피엔딩으로 신부의 서신이 로미오에 제대로 전달되서 줄리엣과 함께 떠난다는 것은?
갑자기 흔하디 흔한 우리들의 삶이 투영되기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이 연극은 단 둘의 광대가
이토록 열광적으로 동분서주하게 만드는 여기까지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코믹 아닌 코믹극에서 눈시울 뜨거워지는 민망함은 나만의 몫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아름다운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내일의 희망을 새롭게 꿈꾸는 저 두 광대에게 밝은 미래가 찾아오길 바라며
두 광대도 사랑스럽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름다운 이 극을 내년에도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출연 : 구옥분, 서인권, 류찬



2025년 4월 12일 토요일

연극 -초록의 찬란-

 

극장이 엄청 크고 넓은 곳인데 좋은 객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판매조차 안하는거 같다.
그럼에도 만석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관객이 많던데 왜 이렇게 가운데 자리만 판매했을까
어차피 만석이 될것도 아니니 이상한 좌석을 오픈할 필요가 없었으려나

전체적인 내용은 뭐랄까? 영화 '바이센테니얼맨' 같다고 할까? 아니면 'AI'같다고 할까?

주제가 신선하거나 특별하진 않다. 인간 이외의 지능(이젠 인공지능이라 하기엔 너무 올라선거 같음)의 존재와
어떤 연결고리에 대한? 사랑?-이런걸 사랑이라 하는걸까?-
어떡게 보면 인간의 나약함을 강인한 로봇이란 존재가 불쌍히 여기는 연민정도는 아니었을까?
(진실은 아니지만 괭이가 사람을 보는 눈이 털없는 불쌍한 괭이정도로 여긴다던데 ^_^)

휴머노이드 로봇은 자신의 행동이 연민인지 사랑인지 특별히 표현하지않는다.
(이부분이 좀 마음에 드는데 직설적으로 좋아하네 마네 그랬으면 좀 후져보였을거 같음)
자기 할일만 하는 차가움이 있다. 이런면에서보면 반려묘(괭이)의 행동 같기도 하고(작가가 괭이를 키우나?)
인간과 휴머노이드 로봇간의 사랑을 다루는 소설들의 특징아닌 특징은 외형만 로봇일뿐
사람으로 보는것이 맞고 이 연극도 그것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멜로 드라마정도로 느껴진다.

SF라 해도 어떤 관계, 사랑이 주된 소재라면 모든 등장 요소는 인간으로 봐야할것이다.
적어도 무생물에 사랑을 느끼는 변태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연극에서 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인물 정원은 자신이 원해서 칩을 이식받은것이 아니라는 것에 큰 불만을 갖곤 있지만
진행되는동안 칩을 뗄려고 크게 노력하지도 않는다. 도끼(?)로 손쉽게 떨어지는 칩인데 그대로 둔것을 보면 투정 부리는 아이같다고 할까?

칩을 붙일때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붙여졌고 떼어질때 역시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떼어져서
어느쪽이 선택되었다하더라도 만족하거나 합리화 하는 삶을 얻지는 못해보인다.

정원이 초록색 칩을 원했듯 이 사람은 안정되고 평온한 삶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막상 그것을 찾지 못한 영화 '초록물고기'처럼

무엇이 옳은것인지 그른것인지 그것이 정원과 A(로봇)에겐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둘간의 관계도 중요히 여기는것 같지도 않다.
작가가 추구하는 연인의 관계란것이 이렇듯 자신의 일들에 충실하며 함께 걸어가는것일지도

전개상 이해가 좀 이상한것은 갑자기 왜 로봇과 싸움을 하는걸까?
그냥 칩을 이식해서 생물학적 불안정을 안정적으로 바꿔주는 사이보그 형식 정도고
약간은 조정하게 하는정도의 칩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을뿐인데
이것을 기획했던것이 로봇들이란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은 지구를 파괴하는 암적인 존재쯤으로 생각하는
박사의 통찰도 있어서 어느정도는 통제범위에 가둬두려는 수작일수도 있는데 그러면 칩을 떼어내면 그만 아닌가?
왜 서로 총질을 하는걸까?
로봇들이 칩을 떼어내려는 조직을 말살하려는건가?

멜로에서 잠시 전쟁 스릴러로 바뀌지만 결국 드라마로 끝나버린다.
내 개인적으론 인간과의 관계는 무척 어렵다고 느껴지기때문에 안드로이드던 AI던 어느정도 시점에 도달하게 되면
나는 인간보다는 이런 AI와 교감하는것을 선택할거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과도기적 관점에서 그런것이고 좀 더 지나가면 구차한 물질 세계마져 사라질거란 생각이긴 하지만
연극은 인간의 파괴적 본능과 그것을 닮아버린 안드로이드 그리고 서로간의 전쟁
하지만 지구에서 다시 새로운 생명을 꿈꾸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

전체적으론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다가 인간의 본능때문에 필연적으로 디스토피아를 거쳤으나
이것 역시 필연일까? 자연의 생리일까? 다시 안정된 그리고 변화가 없는 이데아로 넘어가는 장대한 서사를
짤막한 100분정도에 그려내고 있는거 같다.

배경이 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왜 주변에 생물이 거의 없는것인지. 왜 꽃과 풀이 없어서 안드로이드는 그것을 키우려 애쓰는 것인지
부연설명이 좀 섭섭

출연 : 신사랑, 류이재, 황규찬, 이태하, 유재연, 조윤정,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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